하재봉의 영화사냥 열세살, 수아

열세살 수아

감독 : 김희정
배우 : 이세영, 추상미
제작년도 : 2007년



올해 한국영화의 의심할 필요 없는 수작이 있다면, 그것은 [열세살 수아]다. 낯선 신인 감독의 작품을 보기 위해 극장 입구로 들어서면서 포스터가 참 낡았구나,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참 촌스럽게 포스터를 만들었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시간이 흘렀다. 나는 완벽하게 감동했다. [열세살 수아]는 내가 본 최고의 한국 성장영화다.(그렇다고 해도 포스터의 감각은 너무 낡았다. 꼭 80년대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것이다!)


열 세살 시절에 난 무엇을 했나? 지금 마흔이나 쉰, 혹은 예순이 지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 열세살 시절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아이에서 갑자기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학교와 집으로 둘러쌓인 따뜻한 세계만이 내가 사는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장기의 고통에 찬 터널을 지나야만 한다. 깊고 어두운 터널이 유난히 더 길고 캄캄한 경우도 있다. 아주 드물지만 영원히 그 터널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왜소한 개인의 자아가 거대한 세계와 맞부딪치게 되면 피 흘리는 쪽은 개인이다. 특히 아직 뚜렷하게 자아가 확립되지 않고 모든 게 혼돈이고 정처없는 청소년기를 다룬 영화를 성장영화라고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저절로 우리들의 지난 삶을 되돌아 보게 만드는 힘이 [열세살 수아]에는 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에는 우리 주변의 수많은 수아들이 생각난다. 삶을 바라보는 진솔한 시선, 과장하지 않고 그것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활력 있는 생기가 저예산으로 만든 신인 김희정 감독의 [열세살 수아]가 주는 감동의 원천이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은, 직접 각본까지 맡은 김희정 감독이다.


지방 도시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수아(이세영 분)는 이제 열세 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복을 입기 시작한 수아의 모습으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수아는 식당 일을 하는 어머니 영주(추상미 분)와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는 늘 잔소리를 하고, 수아는 학교가는 길에 불량학생에게 붙잡혀 얻어맞기도 한다. [열세살 수아]는 대부분의 사춘기 청소년들처럼 가족과 학교로 구성된 수아의 일상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거울이나 유리창에 반사되는 수아의 모습이 자주 카메라에 포착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김희정 감독은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수아의 내면을, 유리에 반사되는 수아의 씬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수아의 일상에 관한 섬세한 관찰만이 이 영화의 장점은 아니다. 김희정 감독은 무엇을 생략하고 무엇을 세밀하게 보여줘야 할 것인지 영리하게 파악하고 있다. 유행어를 빌려 말한다면, 선택과 집중이 잘 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하는 엄마를 보면서 수아가 느끼는 혼란, 그리고 막연한 불안과 동경. 아직 거대한 세계와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춘기 소녀에게, 현실은 너무나 무겁고 크다. 수아 주변에는 일탈적인 삶을 사는 친구도 있고 학교의 모범생으로 살아가는 친구도 있다. 김희정 감독은 균형 감각을 갖고 수아 주변의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수아의 어머니는 고물상을 하는 남자와 만난다. 그리고 수아와 함께 고물상 안의 좁은 공간으로 이사를 해서 함께 살기 시작한다. 수아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런 변화가 싫다. 낡은 잡동사니로 가득찬 고물상도 싫고 그 남자도 싫고 그곳에 함께 사는 자신의 어머니도 싫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싫기만 하다. 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보면서 그 일기 속에 아버지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윤설영, 지금의 최고의 인기 가수가 되어 있는 그녀가, 수아는 자신의 진짜 어머니라고 믿는다. 결국 일상에서 좌절한 수아는 자신의 진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가출을 결심한다.


[열세살 수아]의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윤설영 역을 맡고 있는 자우림의 등장 장면이다. 수아는 윤설영의 공연장까지 따라가 직접 윤설영을 만나기 전까지, 비를 주룩주룩 맞으며 윤설영의 승용차 밖에서 아버지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 모르시냐고 울먹이는 그 순간에도 수아는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믿고 있다. 윤설영의 모습은 그 이전 수아의 삶에서 환영처럼 자주 등장한다. 수아의 앉은뱅이 책상 밑에 넣어둔 비밀상자에는 윤설영의 노래하는 모습이나 인터뷰 장면들을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가 들어 있다. 하지만 잠깐 환영처럼 등장하는 윤설영의 모습은, 낡고 누추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열세살 수아에게 현실을 초월하는 힘을 부여한다.


수아 역의 이세영은 [아홉살 인생]이나 [여선생 VS 여제자]보다 훨씬 성숙된 연기를 보여준다. 깨끗한 맨 얼굴과 중학생 교복 차림의 수아의 모습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열 세살 왜소한 수아의 캐릭터를 훌륭하게 형상화하는 외적 장치다. 이 영화는 또한 성인 배우로 성장해가는 이세영의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수아의 엄마인 영주 역의 추상미도, 젊은 과부로서 자신의 인생을 포기할 수 없지만 딸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캐릭터를 깔끔하게 표현했다. 군더더기 없고 자로 잰듯 정확한 연기는, 수아의 감성연기와 만나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열세살 수아]는 전라북도의 영화기금으로 만들어진 영화 중 하나이다. 김희정 감독은 해외 유학시절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 시나리오를 썼고 세계 신인감독들의 작품을 후원하는 [칸느 레지당스]와 전라북도, 한국영상위원회의 인정을 받아 영화가 제작될 수 있었다. 특히 수아 엄마가 고물상에 있는 낡은 버스를 개조해서 만든 노란 버스 식당이 파란 보리밭을 지나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인데, 겨울에 촬영된 이 씬은 전주영상위원회의 도움으로 한 겨울에도 파란 빛으로 넘실대는 고창 청보리밭에서 촬영되었다.

글:하재봉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carreta.egloos.com/tb/284155 [도움말]

덧글

덧글 입력 영역


메모장

W 위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