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영화제 ‘피치앤캐치’ 1등 김희정 감독 제작비 마련 분투기

“시나리오 공개시장 키워서 제2의 최고은 사태 막아야”

[한겨레] ‘청포도 사탕’ 칸 인정 받았지만

국내선 제작비 4억원 마련 끙끙

공개설명회로 받은 1천만원 큰힘



‘피치앤캐캄 1등 김희정 감독
제작비 마련 분투기


집 앞 호수에 배를 띄워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시골마을이었다. 김희정(41) 감독은 2009년 9~11월 3개월간,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물랑예술가의 집’에 머물며 시나리오 <청포도 사탕>을 썼다. 왕복항공권, 숙식비용뿐 아니라, 한달에 1300유로(약 200만원)의 용돈까지 지원받았다. 프랑스 칸 영화제가 운영하는 신예 감독 육성 프로그램 ‘레지던스 드 페스티벌’ 덕이었다. 각국 감독들을 대상으로 시나리오 구상에 대해 심사한 뒤 뽑힌 이들에게 집필에만 몰두하도록 후원하는 제도다.

시나리오를 안고 돌아온 건 그해 12월. “이제 한국에 가서 영화를 만들어보자”며 귀국해 국내 투자자들에게 시나리오를 돌렸지만, 선뜻 나선 곳이 없었다. 익히 보던 ‘충무로판’ 상업영화가 아닌 탓이었다. 성수대교 붕괴로 친구를 잃은 여중생들이 서른살이 돼 다시 만나 죽은 친구 언니 집으로 찾아가 과거의 진실과 마주하는 이 작품은 시대적 아픔을 간직한 여성들의 내면을 세밀하게 쫓아간다. 칸 영화제가 먼저 알아보고 전폭 지원한 시나리오였지만, 정작 국내에선 선보일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것이다.

지난 19일 서울 상암동 첨단산업센터의 작은 사무실에서 만난 김 감독은 “창문도 없는 방”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그는 “인지도가 높은 감독이 아니어서 ‘이런 작품이 있다’고 세상에 알리기가 참 쉽지 않았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폴란드 우쯔국립영화학교를 나온 그는 2007년 추상미, 이세영 등이 출연한 영화 <열세살, 수아>를 연출한 바 있다. <열세살, 수아>도 2005년 칸 영화제 레지던스 지원작으로 선정돼 다섯달간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근처 아파트와 월 900유로 생활비 등을 지원받으며 쓴 작품이다.

귀국 뒤 1년 남짓 투자자를 찾지 못한 그가 결국 문을 두드린 곳은 지난 14일 폐막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피치 앤 캐캄 프로그램이었다. 기성 감독, 영화사 관계자 등 심사위원과 관객 앞에서 시나리오 내용과 예상 제작비 등을 설명하고, 투자자들과도 만나는 신예 감독들의 공개 경쟁 제도다.

“마치 평창 겨울올림픽을 유치하는 심경으로 한달여간 공개 피칭(설명회)을 준비했다”는 김 감독은 “작품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해야 하는 시간에 ‘왜 내가 이런 걸 준비하나’란 생각도 했지만 내 작품의 가능성을 알릴 수 있는 통로인데다, 솔직히 밥도 먹고 시나리오 수정·개발도 할 수 있는 1000만원이 꼭 필요했다. 우리에겐 적지 않은 돈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나리오가 탄탄하다”는 평과 함께 극영화 부문 1등작으로 뽑혀 기획개발비 1000만원을 따냈다.

김 감독은 신예 감독과 작가들을 위해 시나리오 집필에 필요한 기획개발비 지원과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오픈마켓이 더 활성화돼야 한다고 했다. 대형 투자자들이 “이 아이템 괜찮은데 한번 진행해 보자”고 하고도 작가들에게 최소한의 비용도 주지 않는 관행이 반복되면 생활고 등으로 숨진 최고은 작가의 비극이 또 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지원을 끊었다가 올해 복원할 예정인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기획개발비 사업도 한해 40편 남짓 정도만 주는 예산 8억여원으론 부족하다는 영화계 여론이 높다.

김 감독은 “생활비 담보가 되지 않은 감독과 작가들이 자기 돈 들여가며 작품을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신인감독들에게 개발비를 지원하고 투자자도 만날 수 있는 공개 피칭 행사를 새로 만들거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피치 앤 캐캄 같은 기존 행사에 비용을 후원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7월부터 촬영하는 것이 목표인 <청포도 사탕>은 순제작비 5억원을 예상하고 있지만, 아직 4억원을 마련하지 못했다. 김 감독은 “젊은 여성들 내면을 다룬 이 영화에 관객도 많이 들 것 같은데…”라고 웃으며, “아직 문화와 장르의 다양성이 부족한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글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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